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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피닉스 2014. 6. 12. 18:17

삼한이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하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 되어 왔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진한과 변한의 경우

대체로 낙동강 동쪽 지역을 진한, 서쪽 지역을 변한이라 하여 지역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예외도 있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삼한사회에 대한 사료로 가장 중요 하면서 오래된 것은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이며, 그 내용이

〈후한서 後漢書〉·〈진서 晋書〉 등에 축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매우 적어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삼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우리측 문헌기록에는 더욱 단편적인 내용만이 실려 있어

 삼한의 역사를 미궁에 빠뜨리고 있다.

 

울나라 삼한시대에 마한으로 불리는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미륵사 창건 설화가 간략히 소개돼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석탑을 두고도 서기

7~8세기 경으로 건립연대를 막여히 추정 할수 박에 없었다. 이런 모든 미스테리를 풀어준것이 가로 15.5cm 세로 10.5cm

짜리 금판에 쓰여진 한자 194인것이다 적어도 서탑의 경우 건립된 때가 639년 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함 신라군이 처들어와 보니 이곳에 불국사보다 더큰 거창한 절이 있는것을 보고 전부 불질러

버리고 4m를 돋아버렸다는 야그가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서탑만 남아있다. 발굴해보니 거대한 절터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임니다.

익산에서 약 10Km 쯤 떨어진곳에 있는 유뮬 전시관에 안에 들어가봄 첫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절터가 있는데 ~~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서기 600-641재위)이 창건하였다. 미륵사의 창건 기사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무왕은 왕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獅子寺)를 방문하는 길에 미륵삼존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지명법사가 무왕을 도와

하룻밤 새에 연못을 메우고 세 개의 금당과 세개의 탑으로 구성된 광대한 가람을 조성하였다. 미륵사지 석탑은 2009년 1월

출토된 사리장엄을 통해 창건시기가 639년으로 밝혀졌으며 1,40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금당과 탑 가운데 유일하게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7세기 이전에 이미 붕괴되었으며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고 최근까지도 절반 이상 무너진 상태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고, 현존 최고(最古)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1층 내부에 있는 十자형 공간과 심주, 천장의 구조 등은

고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석탑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해체보수를

결정하였다. 이에 전라북도에서는 석탑 해체를 위한 가설덧집을 설치하였고 2001년 10월 이후 국립 문화재 연구소가 대행

사업으로 수행하고 있다. 2010년에 해체 및 발굴조사까지 완료되었으며 현재 보존처리 및 보수정비설계를 진행 중에 있다.

사진에서 뒤에 보이는 산이 430m의 미륵산이고 우측에 있는 탑이 돌로된 동탑이고 좌측이 서탑이람니다.

 

 

 

 

아주 옛날에 어떻게 이리 거대한 절을 세울수 있을가하는 의문은 이사진들을 봄 알수 있을것임니다.

 

 

 

드디어 완성된 미륵사지 임니다.  그러나 여기엔 익산 에서 해마다 열리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축제에 관해

조금 알고 가야 겠읍니다.

 

 

 

 

 

“善花公主(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아름답기 그지없었는데, 이를 연모(戀慕)한 서동(薯童), 즉 후일의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善花公主)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마을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자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귀양을 보냈다. 귀양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그녀를 구출해주고 두사람은 백제로 건너가 결혼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서동은 법왕의 아들로서 후에 무왕이 되었고, 따라서 선화공주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

선화공주는 무왕에게 청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彌勒寺:왕흥사라고도 함.)를 창건하였고 무왕과 사이에서 아들

의자(義慈)를 낳아 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었다는 설과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익산미륵사에 근거하여

선화공주는 익산지역을 지배하였던 지방 토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백제는 지방호족이 강력하여 무왕이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여를 떠나 익산으로 천도하고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무덤이 선화공주의 묘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여러 차례 도굴되어 확인할 수는 없다

(네이버 두산백과).“

 

전시관을 나와 이제 서탑을 구경가야 겠읍니다.

 

이십년 넘게 공사가 지지부진함니다. 예산이 없어서 그러겠지만 제생각은 그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새로이 만들어 놓은 동탑이람니다. 탑아래에 문이 달려 있는것이 특히하고 옛날엔 뒤에 보이는 미륵산엔 호랑이가

살았다는데 ~~글구 미륵산 올라가보면 성터도 있담니다.

전부 발굴된 돌들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