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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B)

피닉스 2014. 11. 5. 20:12

아름다움이 가득한 제이폭포 들어가는 계곡에서 밥을 먹고 다시 제삼폭포를 구경할려 올라가니 얼마가지 않게 나타났다.

주왕산에는 제일 폭포 용추폭포 제이폭포 절구폭포 제삼폭포 용연폭포가 있는데 규모는 제삼폭포가 젤 크다.

점심 먹은 계곡 임니다.

 

드디어 제삼폭포를 구경할수 있는곳에 도착했읍니다.

  하식동과 피아메를 관찰 할수 있는곳

용연폭포는 주왕산 국립공원 폭포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한 폭포로서 물이 두줄기로 떨어 집니다. 구혈은 2단 폭포와

연결되어 있으며 폭포 왼쪽에서 3개 오른쪽에서 1개의 하식동을 관찰하수 있습니다, 폭48m 길이 37m 수심 약4m 에 이르는

폭호가 형성 되었으며 용추푹포에서 볼수 있는 피아메는 동전 크기 정도인데 용연폭포에서는 그보다 훨씬 근 피아메를

관찰할수 있습니다,

 * 구혈: 폭포 아래쪽에 생긴 원통형의 깊은 구엉 일명 돌개 구멍이라고도

 * 하식동: 폭포나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겨난 동굴

  

 *피아메란:

크기가 4mm 보다 작은 용회암질 화산재가 퇴적되는 과정에서 잠열과 압력으로 인해 검고 길쭉한 모양으로 굳은

것을 말한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대전사로~~~결국 온길을 되돌아가는 겨우 6km 쯤 거리 군요.

증말 널널하게 놀면서 이곳저곳 구경했읍니다.  

 

 

 

 

단풍구경할려 많은 분들이 오셨군요. 전국이 이런 현상이람니다.

 

 

 

 

 

 

 

 

 

 

 

 

 

 

천하를 꿈꿨던 주왕, 당나라 와의 전쟁에서 패하다

주왕은 진나라에서 복야상서 벼슬을 지낸 주의라는 사람의 9대손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이 주도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범상치 않았을뿐 아니라 5세때 이미 글을 배워 11세 때에는 육도삼락을 통달하였고 천문지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주도는 이때부터 왕후장상을 꿈꾸면서 황하강의 물을 들이 마시고 태산을 갈아 뒤엎겠다 고 말하고 다녔다.

진나라의 후손 종에 큰 인물이 없음을 한탄한 주도는 성인이 된후 후주의 천왕임을 자청하며 반기를 들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쳐들어 갔으나 곽자의 장군에게 대패하였다.

주왕산으로 몸을 숨긴후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다.

싸움에 대패한 주도는 석병산(주왕산의 옛이름)이 매우 깊고 험준하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숨어 들었으나 식량이 없어

인근 주민의 식량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게 되었다.

당나라에서는 신라에게 (당시나당연합 상황) 도망간 주도를 잡아 달라고 요구하였고 이에 신라 왕실에서는 갑자기 약탈과

노략질이 성행해진 석병산을 이상히 여겨 찾아와본 결과 주왕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려 마장군과 그의 5형제들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주왕의 군사들이 기암봉에 이엉을 씌워 노적가리 처럼 위장 한뒤 군량미가 많은 듯이 보이게 하여 마장군 형제들은

주왕의 군사가 많은 것으로 여기고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주왕의 지략을 알게된 마장군은 장군봉에 올라 위징해 놓은 노적가리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기암의 중간쯤에 바위가 뚝 떨어져 나간 듯한 흔적이 바로 마장군이 화살을 쏘아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한다.

그후 마장군의 군사가 공격하니 주왕의 군사들은 무너졌고 주왕은 체념하고 천해의 요세 주왕굴에 숨어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날 세수하려고 주왕굴 앞으로 나왔다가 화살 맞아 최후를 맞이 했다.

주왕굴에서 최후를 맞이한 주왕에겐 대전이라는 아들과 백련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주왕산의 대전사와 백련암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함니다.

이런 글이 있어 읽어보고서야 그럼 왜 주왕산 이라 했는가란 의문점이 풀린순간임니다.

오전엔 못봤지만 이제보니 여기 전부 쓰여 있군요.

 

주왕 신라 군사를 막기위해 자하성을 쌓다

.자하성(주왕산성)

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주왕이 주왕산으로 숨어 들어온 후 당의 요청을 받은 산라 군사를 막기우해 대전사 동편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쌓은 돌담으로 길이가 약 12km(30 여리)에 달하혔다고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할수 있는 요새로 돌문과 창고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의 형체는 거의 사라지고 성터의 자취만 남아 있다 그러나

주왕산성은 축조시기에 따라 주왕전설과 관련하여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의견과 고려시대 이후로 보는 의견이

있으며 현재까지 연구중이다.

 

주왕암(절)

919년(태조 2년)에 눌옹 이 대전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는 나한전(법당) 중층 누각인 가학루 요사채 칠성각 산신각이 있으며

나한전 후불 탱화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470호로 지덩 되어 있다.

암자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주왕굴이 있다.

 

주왕굴

주왕암에서 남쪽계곡의 암벽을 따라 올라가면 주왕굴이라 불리는 동굴이 있다. 이동굴에서 주왕이 은거하였는데

주왕굴 옆으로 떨어지는 물에 세수를 하러 나왔다가 마장군이 쏜 화살에 최후를 맞이 하였다는 설이 전해 진다,

 

수달래(산철쭉)

수달래는 우리나라 중부이남의 해발 1600m아하 지역 산지에 자생하는 낙엽관목으로 햇볕이 잘드는 양지의 사질양토에서

잘자라며, 주왕산에는이곳 주왕계곡 주변에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주왕산의 수달래는 신라 말기 당나라에서 피신한

주왕의 원한이 맺힌 영혼의 꽃이라 하여 수단화라고 부르기도 한다.